무중력이었다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유리나 사기로 된 물건의 파편은 공기 저항 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직선으로 튕겨나가게 된다. 혹여 깨지는 그 순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미세파편은 우주기기에 치명적일 수 있다. 게다가 무중력 공간 어딘가를 떠다니다 눈 등의 예민한 신체부위에 닿게 되면 큰일날 수 있어서, 우주선에는 보통 유리나 사기, 도자기 등의 물품은 가져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가끔 파편이 날리지 않도록 제작된 특수제조된 강화유리나 세라믹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 깨진 물품은 '깨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한 제품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즉 이 경우, 그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아도.
"이야 손 맵네? 미안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었어?"
웃으며 사과하는 라일의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찍혀 있다. 여자의 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간적으로 세츠나의 힘 전체를 밀어넣어 날린 손등 따귀였다. 얼얼한 감각에 잠시 뺨을 만져보았다. 지끈한 열기를 보니 아마도 부어오를 것이고, 이후 몇시간 동안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며 힐끗거릴 몰골이 되어 있을 것이다.
"...됐다."
그리고 그 타격을 날린 사람은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맨손으로 흰 파편을 주워담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속으로만 혀를 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이스터들의 개인실은 모두 같은 디자인으로, 개인 소지품이야 두는 곳이 자유라고 해도 기본으로 갖춰진 물품들은 간수해 두는 곳이 같도록 되어 있다.
물이 필요없는 흡수 폼을 손에 든 라일은 흰 도자기 파편을 직접 손으로 줍고 있는 세츠나 옆에 앉았다. 의아한 눈으로 이 쪽을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미 세츠나가 주워낸 큰 파편 외 남은 것들을 싹 폼으로 집어낸다.
"그런 파편을 손으로 직접 집으면 안되지. 괜히 다쳐."
"너..."
"엄마가 안 가르쳐 주셨어? 그럼 그 얘기도 못 들어봤겠네, 이런 파편을 잘못 다뤘다가 박혀들어가면..."
손가락 끝에 파편이 박혀들어가 심장까지 타고 들어가, 그만 숨이 멎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세츠나는 들어본 적 없는 얘기를 하는 남자의 등을 보며, 손에 들린, 이제는 무의미한 파편 조각이 되어버린 것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붙이거나 맞출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옛날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이제 복구할 수 없는 손실이 되었으니까.
"왜 깨트렸지?"
"...응?"
잠시 대답이 늦었다. 지나칠 정도로 넉살이 좋은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그 간격이, 세츠나에게는 돌처럼 단단한 확신으로 자리잡았다. 아니, 확신이라면 아까부터 이미 충분히 하고 있었지만.
등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지금 표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그 미소가 잠시 흔들렸을 것이라고, 세츠나는 확신했다.
"그가 준 것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의 기념이라면서."
"...형이? 이거 두배로 미안한걸. 그래도 준 사람의 동생이 깼으니 좀 봐주라."
얄밉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내고 이 쪽을 보는 얼굴에는 한치의 동요도 그림자도 없다. 애시당초 세츠나 쪽이 그런것을 기대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밝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상쾌해 보일 만큼.
"엇...너!"
녹색 눈이 커졌다. 그러쥐었던 손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흰 자기 파편에 피가 묻어난 것을 본 것이다.
"어이! 그러다 큰일난다!"
다른 듯 하면서도 같고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손을 펴서 들고 있던 파편을 남김없이 쓰레기 처리통에 넣게 하고, 지구중력이라 다행이라면서 손을 가져가, 지구 중력 하에서만 사용 가능한 세면대에 손을 가져가 재빨리 물을 튼다. 하지만 거기까지 뿐이다. 그곳에는 그가 자신을 보던 그 '시선'은 없다. 훨씬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혹은 교활한 무언가가 있다. 그 간격을 느낀 순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너희 세계의 예언자가 온 날이라고 들었다."
"어?"
잠시 무슨 얘기인가 갈피를 못 잡던 남자가, 간신히 대화의 가닥을 기억해 내고는 씁쓸히 웃는다. 지독히도 그와 닮은 얼굴로.
"뭔 얘긴가 했네. 예언자라...정확히는 구원자지."
"그가 왔는데도 왜 너희의 세상이, 아니, 우리의 세상이 이 꼴인지 물었다. 신은 없다고 했지."
"......그래? 그래서 형이 뭐랬어?"
"넌, 뭐라고 대답하겠나."
"글쎄, 세상을 망친건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이야. 정도?"
적갈색 눈동자가 한동안 녹색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렇군. 그와는 다른 대답이다."
"대체 형이 뭐랬는데?"
"가라."
문 쪽으로 다가가 버튼을 눌러 열고 라일을 바라본다. 그의 문명권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서 배웠겠지. CB의 누군가, 혹은 '그'에게서. 라일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오케이, 나중에라도 그 답은 꼭 들려줘."
"....."
침묵을 형편좋게 수긍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형제가 둘 다 갖고 있었다. 벗었던 옷은 아까 다 입었고, 적절히 우스꽝스러운 녹색의 볼레로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집어들고, 라일은 다시 한번 깨어진 물건의 운명에 대해 사과의 말을 가볍게 날리고 방에서 나갔다. 남은 건 묵묵히 이전의 대화를 회상하는 세츠나 뿐이었다.
신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소년에게, '그'는 난처한 얼굴로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의 사물함을 뒤져 도자기 천사를 꺼내주었다. 단지 동생이 생각났을 뿐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천사의 이름을 한 건담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소년에게, 나중에 그는 얘기했다. 신이 있건 없건, 우리는 구원을 바라고 있지 않느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피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어쩌면 정말 회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건네준, 체온으로 따뜻해진 도자기 천사를 생각하면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세츠나는 얼기설기 응급처치된 손을 바라보며, '그'의 파편이 하나 또 없어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람이 헤퍼서 말이지."
라일은 혀를 차며 방 버튼을 눌러 록을 해제하고 개인실에 들어갔다. 개인실에 따로 붙어 있는 샤워룸에 들어가 얼른 씻고 싶은 마음이 반, 그냥 적당히 푹 자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어쨌건,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걸 주다니..."
그런 물건이었다. 처음 본 순간 진열창에서 반짝이고 있었고, 유순하고 상냥해 보이는 얼굴, 가볍게 모아쥔 손의 천사님에게 반해 용돈을 모았었다. 처음으로 '나만의 것'으로 갖고 싶던 물건이었고, 그래서 형 또한 그것을 점찍어놓고 돈을 모았던데다, 게다가 형이 먼저 다 모아서 사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엄청나게 화가 났었다.
처음엔 다짜고짜 주먹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둘 다 다행히 쉽게 식는 성질이어서 곧 화해했다. 그렇게 갖고 싶다면 주겠다고 말하는 형이었지만, 라일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양보했었다. 라일에게 주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천사님은 이미 라일의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걸 그리도 원하는 형에게 주는 것이 라일로서는 더 기뻤던 것이다. 주먹으로 시작해서 웃음으로 끝난 대화에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버지는 껄껄 웃었더랬다.
가족의 크리스마스, 그것을 주어버리다니.
그걸 또 가만 못 보는 자신의 어이없이 어린 에고에 피식 하고 웃으며, 라일은 적당히 푹 자기로 마음먹었다.
간만의 휴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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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10제 제 파트를 드디어 끝내는군요.
크리스마스때 쓰겠다고 약조드리고는 지금에야 드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메멘토모리는 오비탈 링 던전의 네임드로서, 가뎃사와 호위 함대를 거느리고 있는 골치 아픈 보스몹이다. 본체는 따로 움직이지 않아 어찌 보면 공략이 쉬운 보스 같지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서브 네임드 가뎃사와 간지럽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딜량을 보유한 호위 함대 때문에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단번에 공대가 전멸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단 네임드 기술을 살펴보자.
1. 거대 입자빔
메멘토모리의 대표적 공격기. 단번에 약 20% 정도의 부채꼴로 확산되어 발사되며 오비탈 링 구역 외 거의 전 범위를 포함한다. 직선 입자빔 공격으로, 발사 범위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며 지속시간도 10초 이상으로 길다. DPS는 5만 정도이니 혹시 여기서 방벽-GN필드 켜고 버틴다는 탱커 있으면 아름답게 녹는 장면을 다들 감상해 주기 바란다.
일단 포신의 각도로 발사각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충전 시간이 종료되면 언제 발사될지 모르는 이상 안전한 사각지대인 오비탈 링 위에서 공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어그로 수치가 없이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인 쪽을 공격하는 성향이 있으니, 오히려 가뎃사 탱커를 제외한 공대 모두 사각인 오비탈 링 위에 모여 공략하게 된다는 것이 제일 큰 특징이다.
2. 가뎃사
메멘토모리 공략전에서 입자빔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대상. 이노베이터 몹이라 대단히 속도가 빠르고 주기적으로 어그로가 초기화되는 특성이 있다. 전담 탱커가 한명 붙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원거리 데미지를 자랑하므로 반드시 탱커를 한명 붙여줘야 하며, 절대로 흑마나 법사 등 원거리탱을 시도해선 안된다. 원거리에 비해 근접은 약한 편이라, 회피셋만 제대로 갖춰놓았다면 도적 회피탱이나 분무 탱킹이 가능할 정도의 근접 공격력을 보인다.
3. 호위 함대- MS 소환
메멘토모리는 본체가 움직이지 않는 대신 뒤에 포진하고 있는 호위 함대가 주포를 발사하며, 호위 함대에서 주기적으로 MS가 나와 웨이브를 한다. (조금 다른 형태지만 대략 하이잘 좀비전을 생각하면 된다.) 주포는 주의해서 피해야 하지만 워낙 속도가 느려 왠만하면 다 피할 수 있다. 다만 주포가 터지면서 그 여파로 조금씩 위치가 밀린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점이다.
MS들은 아예 공대원 한명 한명이 상대해도 쉽게 녹일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만, 템 파밍이 제대로 안 된 일던 녹템 정도의 공대원이 있다면 위험하므로 되도록 딜러들이 재빨리 녹여주도록 한다. 데미지 얼마 안 된다고 쌓이게 두고 있거나, 다 잡는다고 화력을 호위함대에만 집중하면 어차피 호위함대는 끝없이 양산되므로 전 공대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 공대 T/O(10인)
메멘토모리 공략전은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실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탱커 : 최소 2인 (가뎃사 탱킹은 도적 회피탱, 분무 탱킹 가능)
힐러 : 약 2-3인 (집중 힐링이 가능한 신기와 공대힐을 봐 줄 수 있는 복술, 회드를 추천한다)
딜러 : 적어도 한 명의 주술사 필수, 그 외 딜러는 근접 딜러보다 원거리 딜러가 좋다.
* 배치
먼저 대략의 본진 배치도를 참조하자.
보시다시피 넖은 공역에 비해 안전지대가 매우 좁은 편이다. 그러므로 공대원들은 최대한 뭉쳐서 절대 메멘토 모리의 사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만, 가뎃사 탱커는 되도록 가뎃사를 본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데려가야 하므로, 힐 사정거리 내 최대 원거리에서 탱킹한다.
호위함대의 딜링은 되도록 체력이 높은 딜러/탱커들이 전방에 위치해 몸으로 막고, 힐러들이 최대한 공대 폭힐로 감당해 내야 한다. 호위 함대에게 밀려 사각에서 벗어나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해선 안된다.
* 구체 공략
1. 1페이즈 - 전투 개시 후 자리잡기
공역에 들어가면 즉각 가뎃사와 메멘토모리의 빔 충전이 시작된다. 첫방은 카타론 함대가 맞게 되므로 안심하고 들어가도 되지만, 카타론 함대는 곧장 퇴각해 버리므로 가뎃사 탱커는 최대한 빨리 가뎃사에게 붙어 본진에서 가뎃사를 떨어트린다.
가뎃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어그로가 리셋되므로, 탱커는 끊임없이 공격하여 가뎃사의 시선을 붙잡아 놓아야 한다. 어차피 가뎃사는 메멘토 모리 구역에서는 죽일 수 없으므로 딜러들은 메멘토 모리 딜링에 집중하되, 반드시 가뎃사 탱커를 공략 끝까지 살려놓는 것도 중요하다. (전담 힐러를 한명 붙이는 것을 추천한다)
그와 함께 본진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오비탈 링 위에서 돌진한다. 선두 탱커들의 도발을 통한 호위 함대 어그로 관리가 중요한 시점으로, 호위함대는 무조건 선두에 선 공대원을 공격하니, 체력이 약한 공대원은 공대 선두 앞으로 뛰어선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한다. 죽고나면 후회해도 소용 없다. -_-
2. 2페이즈 - 충전시간 동안 돌진
1페이즈에서 카타론 상대로 입자빔을 발사한 뒤, 공대가 달리는 동안 메멘토 모리는 충전을 계속하게 된다. 이때를 틈타 사각으로 돌진하는데, 호위함대 빔이 자꾸 외각으로 공대를 밀어내게 되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원거리 딜러들은 메멘토모리의 취약부가 사정거리 내 들어올 때까지 호위함대의 공격을 맞으며 달려야 하는데, 아무리 제대로 달려가려 해도 중간쯤까지 달려오면 반드시 사각으로 밀리게 되는 법이다.
공대 내 필수인 주술사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 바로 그때로, (주술사는 복술이건 고술이건 정술이건 상관 없다.) 주술사는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타이밍을 주시하다, "메멘토 모리가 입자빔 발포를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 순간에 맞춰 정확히 공대 전체에 영웅심(호드:피의 분노)를 넣어줘야 한다.
이 순간 영웅심 타이밍을 놓쳐 전멸하는 공대가 종종 있으므로 가장 주의해야 하며, 사실상 이때 영웅심을 제대로 넣느냐 못 넣느냐가 메멘토모리 공략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심을 넣고 폭딜하면 호위 함대가 밀리는데, 이 때를 틈타 사각 내로 다시 들어오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 다만 이 이후 호위 함대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면서 공대 선두의 딜러들이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힐러들은 최대한 폭힐로 피를 채워주도록 한다. 이동하면서 힐링하는 고난이도의 상황이지만 근성이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3. 3페이즈 - 발사 후 공백을 이용하라!
발사 시점을 제대로 넘겼다면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뎃사 탱커가 이때쯤이면 반드시 가뎃사의 팔 부분을 파괴해 본진에서 시선을 돌리고 가뎃사가 전장에서 빠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공대 돌진 속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 화력을 이제껏 퍼부어 왔다면, 일반적인 DPS를 가진 공대라면 가뎃사의 외부 장갑은 거의 파손되었을 것이다. 돌출부가 드러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데, 마법사와 사격냥꾼의 영혼의 딜이 중요하다. 핵심부를 파괴하면 메멘토 모리 공략전은 끝나고, 호위함대가 연쇄폭발을 벌이는 화려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이상이 메멘토 모리 10인 레이드 공략이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전투지만 이긴다면 달콤한 보상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는 말은 여자에게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시커먼 사내녀석에게 그런 말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지각과 혀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고까지.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하지만 눈 앞의 청년은 다르다. 남성과 여성의 성 차이를 뛰어넘어, 어느 성이 어떤 눈으로 보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다. 단아한 얼굴, 흰 피부, 단정한 눈매는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매는 불쾌함으로 인해 약간 일그러져 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알 수 없는 흡족함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악취미일까.
"별로, 교관님이 그렇게 신경질 낼 건 없을텐데 말이지."
"허세부릴 여유가 있다면 훈련에나 집중해 둬."
날카로운 붉은 시선을 휘감고 눙치며, 초록 눈동자의 남자는 입끝을 올렸다. 티에리아 아데, 그가 들어와서 목격한 셀레스티얼 빙은 일견 더블오 파일럿 세츠나. F. 세이에이가 리더인 듯 하고 전술예보사라는 그 여성의 지휘를 받는 듯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중심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청년이라는 것을 그는 곧 파악해 냈다.
미묘하게, 아주 미묘하게 - 매우 막무가내로 보이는 저 세츠나 F 세이에이마저 이 청년의 의견을 구하고, 하려는 일을 이야기하고, 어떤 가벼운 형식으로든 승인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리더 아닌가 말이다. 아니, 이끄는 자(리더)는 아니더라도 중심, 이라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그런 티에리아가 라일에게 날을 세우고 대한다는 것은 라일로서도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스파이의 정석이라면 어떻게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해 놓는 것이 좋다. 특히 이렇게 상대 진영의 중심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신경써서 꼭 좋아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쪽에 무심한 상태로 만들어 두어야 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라일은 늘 그런 결과를 불러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티에리아의 기분을 거슬리게 만들어놓고는 했다.
왜일까, 사실 라일은 이미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었다. 왜 티에리아를 보면 적절히 무심한 선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이렇게 반쯤은 고의적으로 저 이맛살-이라기보다 솔직히 티에리아의 그것은 남사스러워도 '아미'라 불러줄 만 했다. -에 주름을 만들 말을 한두마디씩 던지게 되는가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바로 자신의 형, 닐 디란디에 대한 티에리아의 감정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머리 끝을 기분나쁘게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톨레미에 처음 들어왔을 때, 펠트라는 소녀는 당황했고, 알렐루야라는 청년은 경악했고, 이제 드디어 이름을 다 외운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는 말을 더듬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놀랐지만 저 티에리아는 대뜸 언짢아했다. 한 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뒤로 보인 적대적인 반응은 그러나,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가 라일의 형과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검색해 본 결과 오히려 4년 전의 셀레스티얼 빙 대파 직전 전투기록에는, 형의 부상이 저 티에리아 아데를 감싼 결과라는 것까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글쎄, 사실 따져묻고 싶은건 이 쪽인데 말이지..."
사실상 잔소리가 반 이상이었던 시뮬레이트 결과 분석 시간을 마치고 나오면서 라일은 티에리아 귀에는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저 귀여운 교관님과 형 사이에 무엇이 있었기에 저러는 건가 말이지.
"뭘 따져묻고 싶다는 건가. 중얼거릴 것 없이 여기서 말해라."
......웁스. 라일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여전히 엄중한 표정을 한 티에리아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 음? 뭐라고?"
"눙칠 생각 하지 말고 말해라. 따져묻고 싶은 게 뭐지?"
보랏빛 시선이 이 쪽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주치는 순간 등골에 흠칫 하고 긴장이 달릴 정도로 압박이 들어간 표정이다.
하지만 긴장한 것도 그 순간 뿐, 라일의 예리한 눈은 차갑고 단단한 벽 뒤에서 뭔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 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지만, 확실히 지금 티에리아 아데는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묻기는 뭘? 우리 교관님께 너무 야단맞아서 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습니다요~ 따라가느라 가랑이 찢어지는 학생 생각도 좀 해 주세요."
티에리아의 눈이 더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라일은 부러 더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미안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듣다 보니 좀 짜증이 났었어. 다음번엔 좀더 잘 할 테니까 봐 달라고."
어째서일까.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전법이 이렇게 안 먹혀든 적도 별로 없었는데, 티에리아는 라일이 이렇게 부드럽게 물러날수록 더 차가운 눈으로 날카롭게 노려보며 뾰족한 말을 한다.
"그러니까, 따져묻고 싶다는 것은 내 조언에 대한 이야기인가? 확실히 하고 싶군."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 쪽은 아무래도 셀레스티얼 빙 여러분처럼 단련된 몸이 아니라,"
"여러분, 이 아니다."
차갑게 가르고 들어오는 말에 라일이 멈칫 말을 멈췄다. 그 말의 절단면에 서서, 티에리아는 여전히 라일 쪽을 싸늘한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그 점이 거슬린다. 마이스터라는 자각을 갖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타자화는 그만두도록 해."
라일은 순간 혀를 물어서라도 그 다음 말을 막았어야 했다고, 가끔 생각했다. 물론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하게 된 생각이었지만.
"헤에- 그럼 이 몸을 동료로 받아주고 있다는 얘기?"
"받아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겐-"
"네 기의 건담이 있고, 조종사도 네 명 필요하시다?"
"......그렇다."
얼음칼로 내려치는 것 같은 말투였고, 그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로 다시금 확언하는 것이다.
동료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은 순간, 라일은 티에리아의 지금 태도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악, 놀라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또다른 모습이 저것 아니던가. 순간, 가끔 크라우스가 '사람나쁘다'고 표현하던 미소가 그대로 라일 디란디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렇게 닮았어?"
책임감 강한 성격, 사람들 잘 곁에 두지 않고, 다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가장 강한 성격. 그런 성격의 사람이 "내 탓"으로 다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나?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닌, 꼭 닮은 다른 사람을 본다면?
"...무슨 소리지?"
늘 뒤를 따라다니다 요즘은 보이지 않던 그 펠트라는 소녀와 이 청년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렇데 닮았냐고 묻고 있어."
거짓말을 못 한다. 너무 서툴러.
당황하는 기색은 거의 비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반짝이는 가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은 분명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니, 정정하자면 라일의 눈에만 보일 정도로.
"...얼굴을 말하는 거라면 기분나쁠 정도로 닮았다. 하지만 그게,"
"어 그래? 그럼 다른데는 안 닮았고?"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그렇게 고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싶은 건가?"
라일은 그 아름다운 얼굴 앞에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지만 분명 흔들리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흥미롭게 들여다 보았다.
"내 말을 오해하고 있는데 말이지, 교관님."
조금 더 큰 키로 살짝 내려다볼 수 있는 얼굴 앞에서 부러 약간 허리를 굽혀 눈을 마주한다. 보통 대화하는 것보다도 꽤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이 다가왔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 쪽을 마주봐 온다. 그런 시선이야말로 어디 해 볼테면 해 보라고 도발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난 왜 날 이렇게 대하는지를 묻는 거야. 내가 닮았나가 아니라."
턱 끝을 들어올리고, 그제서야 앞으로 다가올 일을 깨닫고 눈이 커지는 것을 즐겁게 마주보아 주며 입술로 입술을 덮는다. 경직하는 어깨를 양 손으로 세게 잡고 마침 바로 뒤에 있는 벽으로 밀어 중심을 무너뜨린다. 벽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 저항하기 힘들어지니까.
놀라 벌어진 입에 잽싸게 혀를 들이밀어 아까부터 싸늘한 말만 내뱉던 따듯하고 부드러운 혀를 감고 밀어붙였다. 순간 호흡이 막혀 당황하며 흘린 소리를 즐기며, 체중을 버티기 위해 벌어진 다리 사이에 몸을 밀어넣는다. 어깨를 붙들고 있든 팔을 내려 허리를 안고, 부드러운 단발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슬쩍 몸을 빼려는 순간,
"..............!!!"
다음 순간 라일은 꼴보기 사나운 꼴로 톨레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나마 재빨리 혀를 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혀뿌리를 통째로 씹힐 뻔 헀던 것이다. 게다가 콤비네이션으로 발을 세게 밟히고,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는 라일에게 벽을 박차며 그대로 몸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말하자면 라일은 혀와 발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구는 꼬락서니가 되어버렸다.
"...약하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다음번에 도전하려면 좀더 새로운 방식을 택해 봐."
"......"
손으로 입을 가린채 열지도 못하는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내러벼 두고, 티에리아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복도를 향해 걸어나갔다. 남은 라일 디란디는, 분명 진지하게 시작했는데 왜 마무리가 개그가 되어버린 것인지 고인이 되어버린 형에제 진지하게 물어봤지만 당연히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Unballanced Condition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얘깁니다.
- 둘의 첫날밤인데, 너무 오래 걸리는 거 같아서 중간 끊어올려요. 근데 너무 짧네;;;
- 2편은 3분의 1쯤 써 놨습니다. 2편이 훨 길 거 같아요. 그걸로 부디 용서를...
- 모 님의 블로그 박수글이 올라가지 않는 에러에 처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알렐루야는 검게 포장된 택배를 받아들고 조용히 풀어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알렐루야의 외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구나 인정할 분홍색의 작은 플라스틱 튜브. 그것을 바라보는 알렐루야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가 곧 결심한 듯 날카로워졌다.
오늘이 결행일이다.
Unballanced Night
사실 처음에는 세츠나의 안가에 갈까 생각했지만, 이전에 한번 가 본 바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삭막한"곳인데다 초병의 예민한 귀에 너무 기척이 잘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맨션이긴 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내부 벽 중 목조인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알렐루야가 세츠나의 안가에 들어가고 약 10분쯤 뒤 이웃사람이 벨을 눌러왔다. 손님도 오고 했으니 나눠먹으라면서 반찬을 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시끄러울 수도 있는 - 그럴 수 있다고 데이터 조사를 맡은 세츠나가 말했으니까 사실일 것이다. - 행사를 치러야 하는 터라 그런 식의 개입은 몹시 곤란했다.
그래서 두 마이스터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뒤 런던의 알렐루야 안가를 결행 장소로 선택했다. 호텔이나 모텔 등의 장소는 '로맨틱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원래 알렐루야로서는 어디건 별 상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어째서인가 세츠나가 극력 반대했다. 사실은 둘이 같이 숙박업소에 들어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남들 눈에 "어른"으로 보이는 알렐루야가 예약이나 체크인을 하게 되는 것이 싫은 세츠나의 땡깡이었지만 알렐루야는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둘중 하나에게라도 낯익은 장소가 좋다'는 세츠나의 의견에 '세츠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라고 양보했을 뿐.
며칠 후, 자료 조사를 맡기로 했던 세츠나는 알렐루야가 준비해야 하는 사항을 알려주고, 몇개의 데이터 파일을 참고사항으로 보내주었다. 일단 예정된 대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러브젤을 통판으로 구입한 뒤, 데이터 파일을 얼른 열람하고 - 힉, 남자끼리는 이렇게 하는 건가?! 할렐루야, 세상의 악의가...... [닥쳐 호모새끼] 아니, 하는 사람들은 기분좋아 보이고, 여자와 하는 것과 어찌 보면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또 달랐으니까 - 세츠나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핸드폰에 신호가 왔다. 세츠나의 번호임을 확인하고, 큰길 쪽으로 때맞춰 마중나가자 마침 택시에서 세츠나가 내리고 있었다. 동양계로 보이는 키큰 청년과 아랍계로 보이는 작은 소년. 아마도 그 언밸런스함과 세츠나의 흰색 전통 의상 때문에 둘은 꽤 주목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대부분은 둘이 시선을 향하면 그 압박에 눈길을 얼른 돌려버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세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아무 변화도 짚어낼 수 없었겠지만 알렐루야의 눈에는 보였다. 세츠나도 약간은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이긴 했지만 분명 평소보다 좀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렐루야는 난처한 듯 웃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여전히 말없이 따라오는 세츠나의 기척에 어쩐지 안도가 되질 않고 바짝 긴장된다. 역시, '처음 하는 날'이라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꼭 그거 아니더라도 그럴만도 하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말이다.
사람들이 많은 톨레미 내부에서는 그 시선들을 피해 키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록온이나 스메라기씨와 자주 마주치곤 해서 서로의 방으로 가는 것도 적절히 시간을 골라야 했었다. 대강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생활하는 톨레미 사람들의 감각으로 '밤'이나 '새벽'정도의 시간에 몰래 만나거나 트레이닝룸에서 단 둘일 때 나누는 짧은 시간 외엔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간신히 함께 할 수 있었던 어느 밤, 드디어 '그럴 기분'이 되었던 두 사람은 무려 침대까지 올라간 뒤에야 무서운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 둘 중 누구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신체 건강한 청소년들로서 여성 상대는 대강 여기저기서 - 사실은 주로 록온과 이안에게서 - 주워들은 덕에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가 남자일 때에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른다. 서로 끌어안고 키스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둘 다 몰랐기에 그나마 덜 망신살스러웠을 뿐이지 결국 연인 앞에서는 어쨌거나 당당하고 싶은 10대 소년들에게 만만찮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절대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누군가 알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협력이 잘 되다니!' 하고 감탄할 만큼 강렬하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어쨌거나 하자!'라는, 차마 입에 담기도 뭣한 캐치프레이즈를 향해 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알렐루야가 한동안 바빴기 때문에 자료조사는 주로 세츠나가 했다. 서로 상의해 결행장소와 시간을 정했고, 그리고 드디어, 세츠나가 도착한 것이었다.
알렐루야의 집에 들어간 세츠나는 들고 온 간단한 짐을 풀었고, 그 동안 알렐루야는 도쿄에서 런던까지 꽤 긴 여행을 해야 했던 세츠나를 위해 식사를 만들었다. 원래는 다 만들어두면 세츠나가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리를 하면서도 묘하게 긴장이 되었고, 등 뒤의 기척이 자꾸 신경쓰였다.
틀림없이 세츠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흘끗 돌아본 시선 끝에, 단말에 떠오른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 있는 세츠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이지만, 한 번 정도는 흘끗 이 쪽을 바라볼 수도 있는데 단말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세츠나도 긴장했음에 틀림없었다. 단정짓고 나자 왠지 기분이 좋아져, 알렐루야는 눈앞의 요리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어때? 입맛에는 맞아?"
"음."
'세츠나는 정말 체구가 작아서,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며 그저 끄덕이는 모습만 보면 꼭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며, 알렐루야는 그 '어린애'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떠올린 뒤 아무 말 없이 먹는데에만 집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게 되었다. 뭔가, 말없이 먹기만 하는 세츠나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는 느낌이 되어서.
국민학생이었던 내게 강렬한 충격과 함께 "미인이란 무엇인가"를 각인시켰던 카르멘을 보여준 여왕님이자 여신님. 바로작년, "피겨스케이팅은 서커스장이 아니다"라는 말로 매섭게 회전수에 집착하는 세태를 힐난했던 그분. 카타리나 비트님. 동서독 통합 이후 누드사진도 찍으셨다는데 어캐 구할 수 없을까요 하앍(........야)
나에게 영원히 [여자]를 심었던 1988년의 카르멘. 때가 때인만큼 화장/의상압박 주의.
당시 이 연기를 두고 "피겨 선수의 외모와 매혹 주문이(....)점수에 어떤 연관을 미치나" 같은 얘기까지 있었다는 걸로 그 당시 사람들의 감동을 얘기하겠다.(덧글 보니 아직도 싸우고 있다...어이)
옛날의 그 꽃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옛날에 피어있던 그 꽃들- 소녀들이 모두 따 갔었지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철이 들까
옛날의 그 소녀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옛날에 있던 소녀들- 모두 남자애들에게 갔지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철이 들까
옛날의 그 남자애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옛날에 있던 그 남자애들- 모두 병사가 되었지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철이 들까
옛날의 그 병사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옛날에 있던 그 병사들- 모두 무덤에 갔지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철이 들까
옛날의 그 무덤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옛날에 있던 그 무덤들- 모두 꽃이 되었지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철이 들까
원곡은 이것.
한마디로 반전 노래다. 떄는 1994년. 독일이 통일하고 약간 지나, 세계는 화해무드. 냉전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머리속에 아주 생생할 때였다.
톨레미는 수중항행중, 아리오스가 수납된 격납고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다. 눈을 감으면 아무 소리도 돌리지 않고 어두운 것이 감금되어 있을 때와 아무 차이가 없었지만, 눈을 뜨면 그 곳에는 더이상 구속구도, 군인도, 그리고 마리도 없다. 그저 앞으로 함께 싸워나가야 할 자신의 기체가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
다시 한번 눈을 감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물 속이지만 분명 중력이 있는 이 곳에서 상대의 발소리는 분명히 울리며 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4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감과 중량감 때문에 처음엔 그것이 세츠나의 기척인지 알아채기도 쉽지 않았었다.
"세츠나."
눈감은 어둠 속에 양 어깨를 잡는 세츠나의 손이 느껴져, 알렐루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감은 눈 위에 까슬한 것이 닿아온다. 입술의 감촉은 그 때와 거의 똑같다. 16살 때부터, 세츠나는 늘 까칠한 입술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발라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변하지 않았구나."
"...티에리아는 많이 변했다고 했다."
거기선 가끔 피가 났었고, 그러면 세츠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 낀 거스러미를 잡아뜯어 제거하곤 했다. 깜짝 놀라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만 했었지. 분명히 입술이 아팠을 텐데도.
"변하지 않았어."
세츠나는 눈 아래 자리한 알렐루야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직 눈 밑에는 희미하게 다크서클의 자국이 남아 있다. 장갑 낀 손이 눈꺼풀 밑을 어루만지고, 적갈색 눈이 체크하듯 얼굴을 살핀다. 미묘하게 수척해졌고 좀더 지쳐 보이긴 하지만 '알렐루야 합티즘'에게는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 손이, 오른쪽 눈 근처에 가 닿는다.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세츠나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알렐루야는 한동안 생각한 뒤에야 그것이 자신의 금빛 눈 쪽을 말함을 깨달았다. 사라진 반신이 생각나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세츠나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생각이 마리에게 가 닿았다.
"마리를 만났어."
"마리?"
"날 잊고 있었어. 완전히.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 자신을 '소마 피리스'라고만 생각하고 있어."
아무 말 없이 세츠나는 알렐루야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렐루야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가 누구인지 세츠나에게 제대로 말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시점에서 마리가 누구인지, 대체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부터 추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츠나는 그랬던 적이 없었다. 원하는 만큼을 얻고 나면 그에 만족할 뿐, 상대에게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다르게 얘기한다면 애시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아마도 소년병이었던 당시부터 그런 습관을 들여왔을 것이다. 상대가 상처입고 있으면 보살펴 주고 갈등하면 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해 주고 싶었으니 해 준 것이고, 이미 거기서 만족했기 때문이라- 고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얘기해 줄게."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너무 슬프잖아. 라고, 언젠가 말했었다. 아마도 5년전의 어렸던 알렐루야 자신이.
"...나중에."
의외의 답에 눈이 커지는데,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아왔다. 어느새인가 옛날보다 훌쩍 커진 - 아직도 알렐루야보다는 작지만 - 키 때문에, 이제는 앉아있는 알렐루야에 기대어 제법 눈을 마주보며 입술을 겹쳐올 수 있게 되었다. 그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츠나는 이번에는 좀더 깊이 키스해 왔다. 허리에 감겨오는 손을 느끼며, 알렐루야는 조금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아- 여기서는 좀, 그보다도, 저기,
"세...세츠나, 잠깐! 여기서는 좀,"
"끝까지 갈 생각은 없다. 넌 좀더 쉬어야 해."
아니, 그보다도 저어, 하로군들이라도 오면? 이안씨는?
한번만 더, 라고 말하며 어깨를 끌어안고 명백히 뒤로 밀어붙이는 세츠나에게 밀리며, 알렐루야는 드디어 자신이 이 곳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자신의 건담'들'과 함께.
-END
- 며칠 전부터 머리에 계속 떠올랐던 소품인데, 직장 관두고 한 사흘 돼지처럼 딩굴거리며 겜만 해서 못 올렸지라...
- 요 다음 올릴 건 A모글 완결, 요 둘의 *날밤입니다. 워 세츠알렐 행렬이네요 ㄷㄷㄷㄷ
- 모 님의 삽화에 바치는 글입니다...마은, 우리 알렐루야를 위해 끝까지는 안 갔습니다 ;ㅅ; 모, 몸이.... <- 저도 재활환자라 안다능 ㅠㅜ 일상생활 가능해도 그게 컨디션이 그러니까 ㅠㅜ
- 그리고 세츠알렐, 마리나와 마리가 있다고 해도(...왜 이름이 세트냐;;; 이러다 티에리아는 마리사랑 사귀고 록온은 마리벨이랑 사귀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마리는 너무 여신님, 성모고 마리나는 세츠나에게 이상의 영역, 어찌 생각하면 "유토피아"에 가까워서 저 둘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쭈-욱.